6.25전쟁 학도병의 순국 - 고광염 동문님 등

  해방되던 해 성탄절인 1945년 12월 25일, 조국의 광복과 함께 익산 지역에 유일한 인문계 학교로 모교의 개교를 준비해오시던 이윤성 여사님 등 화성학원 재단 측은 4년제 중학교 1학년 학생 2학급을 모집한 결과 전국에서 응시한 1,200여 명 중에서 무려 10: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129명을 화성농장 뜰에 모아놓고 역사적인 남성중학교 개교식 및 입학식을 거행했습니다. 아직 당국의 학교 설립인가도 받기 전에 미리 학생부터 뽑아 입학식을 가진 것이었지요. 그만큼 창교(創校)의 꿈이 간절했던 것일까요. 이 자리에서 이춘기 이사장님은 기념사를 통해 "배움에 굶주렸던 우리가 조국 광복과 더불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고 이같이 신입생을 맞이하여 입학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다"라고 말씀하고, "여러분은 남성 제1회 졸업생이 될 것이니만큼 남성의 훌륭한 전통을 세울 수 있도록 학구 연마에 전심전력할 것은 물론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교에 입학해 익산역 부근 호남국토건설국 건물 내에 임시로 빌린 가교사, 또 남중동캠퍼스 안에 다함께 땀 흘려 지은 신축교사를 전전하며 수업을 받아온 그 학생들이 저마다 청운의 꿈을 키워가던 1950년 6월 25일, 청천벽력 같은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합니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도 수업을 강행해오던 모교는 7월 10일 익산역 차고가 폭격을 당해 시가지가 온통 아수라장이 되자, 부득이 7월 13일 무기한 휴교를 하고 학생들 일부는 당장 군문에 자원입대하여 전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학도병'이란 이름이었지요. 그 중에서 다섯 분의 학도병 동문들이 전장에서 장렬히 산화하여 조국의 수호신이 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부분 1950년 9월 경북 영천지구 전투에서 순국했다고 알려진 그 장한 주인공들이 바로 고광염, 김병철, 노병국, 손기한(손수환), 신영길 동문님이지요(자료에 따라서는 세 분 또는 네 분으로 각기 다르게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 분들을 모두 합쳐 다섯 분으로 적었습니다).

  그 후 모교는 1951년 7월 26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6년제 중학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개정된 학제로는 엄연히 남성고 제1회 동문님들의 졸업식이었던 것이지요. 그날 졸업장을 받은 학생 수는 86명이었으니, 당초 입학생 129명 중에서 43명이나 줄어든 숫자였습니다.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 중도에 그만둔 학생도 있을 테고 학제 개편으로 3년이나 4년 만에 수료한 학생도 있겠지만, 위와 같이 학도병 또는 북한군의 의용군으로 가서 전사한 학생들도 있었으리라고 추정됩니다. 그밖에도 고1회 동문님들 중에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역한 후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은 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전에 소개해드렸던 전 남성총동창회장 김용수 동문님도 그 중에 한 분이시더군요. 

  '학도병',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직 징집연령(18세)이 안 된 일부 열혈 학생들이 공부를 그만두고 조국을 수호하려고 군에 자원입대했는데, 그들을 ‘학도의용군’이라고 이름 짓고 줄여서 ‘학도병’이라 불렀지요. 그들은 군번도, 군복도 없이 교복을 입은 채로 고작 2주 남짓의 훈련만 받고나서 곧바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펜 대신 총을 들었던 학도병의 수가 전국적으로 5만 6천 명이 넘었고, 그중에 무려 7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요. 당시 국내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거주하던 재일 청년학생 642명도 재일학도의용군을 조직해 참전했다고 합니다. 청년학도들의 피 끓는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고,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땅을 지키려고 꽃 같은 목숨을 바친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후생들에게 주어진 마땅한 몫이겠지요. 6.25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으며 모교 출신 다섯 분의 순국 학도병 동문님들의 영전에 지금 갓 피어난 붉은 장미꽃 한 송이씩 바치고 싶습니다. 임이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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