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형제가 있는 한 집안에서는 누구보다도 맏이의 역할이 빛을 내기 마련이지요. 맏이가 훌륭하면 그 아래로는 자연스럽게 맏이를 본받아 훌륭하게 자라고, 항시 맏이의 감시 감독을 받아 삐뚤어질 수가 없게 됩니다. 맏이의 역할은 결속력이 강한 동문사회에서도 당연히 돋보입니다. 저희 동문사회의 맏이는 제1회 동문님들, 바로 1945년 12월에 입학해 1951년 7월에 모교를 졸업한 모두 85분의 선배님들입니다. 그분들은 실제로는 6년 과정의 구제(舊制) 중학교인 남성중을 1회로 졸업한 것인데, 졸업 직후 1951년 8월에 학제 개혁으로 구제 중학교가 각 3년 과정의 신제(新制)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됨에 따라 사실상 남성고 1회 졸업생이 된 것이었지요.
그 1회 선배님들이 중심이 되어 1953년 12월 22일 모교 유성당에서 ‘남성동창회’가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1회 동기분들 중에서 초대 동창회장으로 선출된 국중렬 선배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강완석, 문흥주, 이동화, 김용수, 최종순 선배님이 차례로 동창회장직을 맡아 수행하셨습니다. 초창기 남성동문사회의 단합을 슬기롭게 이끌어간 기수(旗手)들이시지요. 그런데 그분들과 별도로 남성동창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또 한 분의 빛나는 맏이가 계십니다. 고1회 김기석 선배님입니다.
전북 옥구 태생인 김 선배님은 모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생도 2기)에 들어가 곧바로 6.25전쟁에 참전하던 중 소위로 임관하고, 미국 육군보병학교와 육군대학을 이수한 후 1968년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하셨습니다. 그 후 승승장구 끝에 마침내 1974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남성인으로는 최초로 가슴에 빛나는 별을 달게 되지요. 그리고 4년 뒤 또 소장으로 진급해 육군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과 육군훈련소장을 차례로 역임한 후 명예롭게 전역하셨습니다. 전교사 부사령관 재임 당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의 지휘부가 바로 전교사 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선배님은 그 때문에 국회에서 열린 5.18 청문회에 증인으로 서시기도 했지요.
군문에 계신 동안에 선배님의 모교와 후배 사랑은 각별하기로 소문났습니다. 휘하에 있는 새까만 아랫기수의 모교 후배들을 일부러 찾아내 손수 일일이 격려해주시기도 할 만큼 후배 사랑에 진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배님의 그런 사랑의 실천은 군문을 나오신 후 아예 본격화되었지요. 모교가 소라단 통합캠퍼스로 이전하고 이춘기 학교법인 이사장님이 1989년 8월 갑자기 타계하신 후 모교가 선장을 잃은 난파선처럼 심각한 운영난에 처해진 상황에서, 선배님이 1989년 8월 18일부터 11월 4일까지 3개월 가까이 학교법인 이사장 대행을 맡아 학교 정상화라는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되십니다. 선배님은 결국 동문사회의 의견을 널리 수렴하여 재력가이자 동문중의 한 분인 손태희 이사장님의 학교법인 인수를 무난히 성사시킴으로써 위기에 빠진 모교를 구해내는 빛나는 역할을 하셨지요.
그런데 김 선배님의 후배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 빛을 냈습니다. 선배님은 2000년 4월 남성총동창회 산하의 남성장학재단에 장학금 5천만 원을 기탁하셨습니다. 재력이 있는 기업가나 사업가도 아니면서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그렇게 통 큰 기부를 결단하셨을 것입니다. 그 기탁금은 '한별장학금'이란 이름으로 2001년부터 선배님의 뜻에 따라 3군사관학교나 경찰대 같은 군경 계통 특수학교에 진학하는 후배들에게 지급되어 오고 있지요. 그야말로 동문사회의 귀감이 될 소중한 기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 선배님은 향리에서 편안히 여생을 지내다가 2010년 10월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모든 동문님들이 우러러마지 않는 진정한 남성의 한별이 떨어지고 만 것이었지요. 지금 대전국립현충원 장군 2묘역에 선배님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기울여 우리 남성의 영원한 맏이이신 선배님께 삼가 안식과 명복을 빕니다.